20220515-삶에 있어서 조금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. | |||
관리자 | 2022-05-13 | ||
요즘 사람들은 진지하고, 심각한 문제들을 피하는 경향이 있어요. “답도 없는 걸 왜 고민하느냐?” “골치 아픈 얘기 그만하라.”고 면박을 줘요. 심지어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“진지충”(眞摯蟲)이라고 부르며 조롱해요. 그런데 정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들과 고민해야 할 것들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옳을까요? 그것 역시 옳지 않은 것 같아요. 제가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충격적인 사건 하나를 접했어요.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학생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. 그는 명문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요, 장래 의사가 되기 위해 생화학을 공부하고 있었어요. 성장하는 동안 그 친구로 인하여 부모는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? 주변에 있었던 친구나 선후배들은 그 학생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? 그런 그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어요. 유서에는 단 한 문장, 세 단어가 적혀 있었는데요, “나는 누구인가?”(Who am I?)에요. 내가 누군 줄 모르겠다는 거예요. 이걸 모르면 왜 살아야 하는지,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. 당연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거지요? 이태리에 있는 한 대학 식당에 적혀있었다는 글귀, “그리고 다음에 또...” 역시 그걸 말해줘요.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에게 교수님이 물어요. “자네는 졸업하면 무얼 할 텐가?” “취직을 할 것입니다.” “그리고 다음에 또?” “아마 결혼도 하겠지요?” “그리고 다음에 또?” “아이가 태어나면 잘 키우겠습니다.” “그리고 다음에 또?” “진급해서 돈도 벌고, 사회적 지위도 생기겠지요?” “그리고 다음에 또?” “아이들이 커서 결혼도 하겠지요?” “그리고 다음에 또?” “은퇴하고 손자들을 보지 않겠어요?” “그리고 다음에 또?” “에이, 그 때가 되면 죽겠지요.” 그 때 교수님이 말씀합니다. “그럼 자네는 죽기위해 살았나?” 왜 사는지 모른 체 살기 때문에 인생 마지막에 후회만 남는 것이 아닐까요? 우리 삶을 조금만 관심하고, 들여다보면 삶의 문제들이 보입니다. 부부간에 가장 많이 하는 생각과 말은 “남편(아내)이 이렇게 해 주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.”는 겁니다. 정말 그런가요?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나는 행복할까요? 그렇지 않아요. 아내들을 상담하며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. “남편이 밖에 있을 땐 참 짠하다는 생각이 들어요. 그래서 들어오면 잘 해 줘야지.” 그러는데 “막상 얼굴을 보면 미워죽겠어요.” 아무리 내 뜻대로 되고, 좋은 집을 가지고, 맛있는 것을 먹고, 창고에 그득 쌓아두어도 이 마음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는 없어요. 그래서 예수님은 물을 길러 온 수가성 여인에게 너무 소중한 말씀을 하셨어요. “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.”(요4:14절) 인간은 내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할 수 없어요. 건강한 삶을 살 수 없어요. 오늘 우리가 삶에 있어서 조금 진지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. |